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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뉴스/독일 권위 있는 미디어 전문 "대만의 새로운 의식"주독 대표처 전문번역 사지위찬: 읽을거리 걱정-

페이스북에 독일 주재 대만 대표부는 독일 헤비급 매체 타임지가 발표한 대만 특집기사의 전문을 번역했다. 셰즈웨이 주독 대표도 페이스북을 통해 찬사를 보냈다. 이 기사는 "중국-대만의 새로운 의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제목으로 대만에 대한 독일의 가장 적절한 보도이다. 대만과 중국의 역사적 갈등과 가치를 상세히 묘사해 안타깝게 읽는다. 셰즈웨이는 특히 기사를 쓴 기자는 대만을 다녀온 중국인이라고 지적했다.  

셰즈웨이는 오늘 페이스북을 통해 독일 헤비급 잡지 Zeit Online이 이틀 전 대만에 관한 보도를 발표했는데 이는 그야말로 독일 독자들에게 대만 근대사에다 근대사까지 곁들인 당대략사 수업이라고 지적했다. 사지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셰즈웨이는 특집기사의 제목은 "Streit mit China-Das neue Selbstbewusstsein Taiwan"으로 번역할수 있다고 말했다. 원문을 보고 그는 "최근 몇년간 독일매체가 대만에 대한 보도에서 가장 친밀하고 가장 절실하고 가장 적절하다"고 확신했다.  

보도에 대해 사지위는 다음과 같이 표시했다. 첫편부터 최신 려권중의 대만의 확대된 의의를 지적했는데 전문은 원근각도로부터 대만과 중국의 력사적 갈등과 가치취향을 상세하게 묘사했는데 여기에는 정성공의 반청복명, 위덕승의 "사이드크발레" 등이 포함된다.  

사지위는 특히 글을 쓴 기자는 대만을 다녀온 중국사람으로서 대만의 운명에 대해 극히 동정하고 인정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그는 본명을 쓸 수 없고 필명(Franka Lu)만 쓸 수 있었다. 대만의 운명처럼 느껴집니다.  

문말에 사지위는 독일주재 대만대표부 보도조 청년외교관 옹호의 글 전문번역을 첨부하는것을 잊지 않았다. 

저자: Franka Lu(중국 기자, 기업인, 중국과 독일에서 근무하며 중국 문화와 일상생활을 비판적으로 보도합니다. 일과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필명으로 글을 쓰십시오.)  

일본전략연구포럼 그랜트 뉴샤임 선임연구원은 지난해 대만 수도 타이베이에서 감동적인 장면을 경험했다. 뉴샤임은 승전역 출구 지도에 곤혹스러워하며 서 있었다. 한 젊은 대만 여성이 최근 아시안타임스에 실린 글에서 밝힌 것처럼 협조할 수 있는지 물었다. 다음으로 이 여사는 그에게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는 대만을 중국의 일부로 만들지 말라고 대답했다.  

이 젊은 여자의 우려는 대만에 널리 퍼져 있다. 섬나라와 대만인의 동질감이 갈림길에 서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어떤 방향을 결정하든 되돌릴 길이 없을 수도 있다. 특히 중국과의 관계는 더욱 그렇다.  

올해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많이 발생했는데 그중 한가지 력사사건은 지금까지도 세계 각지의 언론보도에서 마땅한 주목을 받고있다. 즉 대만정부는 최근 신판려권을 발행했다. 려권표지에 있는 대만은 확대되였고 구판려권에는 똑똑하게 읽을수 있는 중화민국이 국장에 편입되여 거의 식별할수 없게 되였다. 지난날 중화민국이라는 명칭은 흔히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오인되였다. 새 여권은 이런 오해가 생기지 않는다. 지금 대만은 더욱 상징적으로 변하였고 자기를 확대하였다. 

이는 대만의 새로운 국가의식과 문화동질감을 용감하게 보여주었다. 이로부터 볼 때 1949년이래 중국대륙에 대한 대만의 옛사랑을 상징적으로 결속지었는데 이는 대만의 전면적인 자아동질감의 시작을 표징한다.  

《나는 대만인이다》 

새 여권 발급을 앞두고 관심을 모았던 위치 체코 합참의장이 대만을 방문했다. 웨지 의장은 최근 30년 동안 대만 방문이 가장 높고 규모가 가장 큰 대표단 단장이다. 극적인 순간, 케네디 베를린 연설에 이어 중국어로 나는 대만인이라고 선언했다. 위치가 대만에 대한 지지가 한창일 때 그가 케네디를 추종하는 담화도 도리에 맞았다. 오늘 대만은 아시아의 새로운 민주등대로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업신여김과 학대를 받고있다.  

위치가 대만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홍콩 정치활동가 12명이 홍콩에서 대만으로 도주하려 했다. 그중 적어도 1명은 향항판의 ≪국가안전법≫을 위반하여 체포되였는데 북경이 이 법률을 강제로 통과시킨것은 향항의 그 어떤 반항도 압살하기 위해서였다. 한세기 남짓한 동안 향항은 중국의 영향범위내에서 용감하고 독립적인 령혼을 위해 자유의 오아시스역할을 하였다. 지금 이것은 이미 과거식입니다. 이제 대만만 남았다.  

홍콩과 달리 대만과 중국은 뒤늦게 고민하고 있다. 500년 동안 이 나라의 신분은 중국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먼저 역사의 무대에 선 사람은 이 나라의 원주민. 그들은 바로 구석기시대부터 그곳에서 생활해 온 남도인들이다. 현재 16개 부동한 족군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대만 총인구의 2.47%(2019년 7월 대만 총인구 235만 7,8705명, 원주민 57만 4,508명)를 차지한다. 나머지 주민의 절대다수는 지난 몇백년동안 이주하였거나 대만에 들어온 한족들이다. 과거의 력사에서 대만의 당지 주민들은 대부분 자치하고 서로 투쟁하면서 강유력한 중앙정부가 통치하는 일이 아주 적었다.  

1624년에 화란동인도회사는 대만에 식민지를 세웠다. 일부 스페인 모험가들도 이곳에서 행운을 만났지만 곧 네덜란드인들에게 쫓겨났다. 그러나 식민주의자들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정성공이 거느린 만청침략자를 반대하는 명조군대는 화란사람들을 축출하고 1662년부터 대만을 통제하였다.  

이때로부터 대만과 중국대륙에는 옛정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명조가 멸망할 때 지난날 군대의 생존자와 난민들은 남쪽의 린근지역에 분산되여 먄마북부에서 타이, 윁남에서 대만으로 갔다. 명조의 유민들은 전조에 대한 자랑과 동경을 품고 해외로 망명하였다. 그들은 자녀를 양육하고 자기를 중국사람이라고 인정하면서 중국을 광복하고 명조를 부흥시켰다. 강대한 청군은 이 꿈을 꺾고 1683년부터 점차 대만을 판도에 포함시켰다.  

청나라가 제1차 갑오전쟁(1894-1895)에서 패배한 뒤 마관조약은 대만의 주권을 일본에 넘겨줄 필요가 있다. 대만인들은 1895년부터 1945년까지의 일본의 통치를 회상하며 감정이 매우 복잡했다. 식민정부는 거리, 가옥, 학교, 병원, 우체국과 공장을 건설함으로써 대만의 근대화를 촉진시켰다. 대만은 신속하게 일본 이외 동아시아에서 가장 진보적인 국가로 부상했다. 그러나 모든 식민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사람들은 대만인을 2등공민으로 취급하고있다. 그들은 원주민의 생존공간을 제한하고 민중을 강박하여 일본어를 하게 하며 이 땅의 자원을 착취하며 당지 민중들의 값싼 로동력을 학대한다. 불만이 빠르게 고조되고 반항도 빠르게 늘고 있다. 

1930년, 사이더크인의 결혼식에서의 한차례 론쟁은 력사적으로 말하는 "안개사건"으로 발전하였다. 사이드커인은 일본 민간인 134명과 일본 경찰 일부를 살해했다. 대만 위덕성 감독의 2011년 사이드크 발레는 이 역사를 묘사했다. 신분 착란 시대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빌 게이츠, Northern Exposure (미국 TV 드라마), Northern Exposure (미국 TV 드라마), 예술명언) 2년 동안 강한 일본군은 현지 연합군의 도움으로 사이더크인을 거의 멸종시켰다.  

이때로부터 "무사사건"은 대만독립운동의 상징으로 되였다. 그러나 대만에서 태여난 세대들도 있는데 일본문화에서 성장하여 경제와 사회의 현대화에서 혜택을 받고있다. 그들의 역사문화적 정체성은 중국 대륙이 아니라 일본에 더 많이 집중돼 있다. 이 세대에서 후에 대만독립의 선구자로 된 리등휘는 1945년까지 일본을 대만의 "조국"이라고 부르며 일부러 대만이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자아정의를 의심했다.  

1945년, 국민당이 령도하는 중국정부는 대만에 대한 통제를 접수하였다. 초대 행정원장 진의는 대만을 일본에 "노예"당한 렬등민족으로 간주했다. 당시 국민당정부는 부패무능하고 잔인하고 무정하였다. 그들은 돈을 흡수하고 대만의 공공건설자원을 리용하여 반공내전을 진행하였으며 중국대륙에서 무서운 통화팽창을 도입하였다. 1947년 정부가 담뱃장사꾼을 잔혹하게 급습해 항의를 일으켜 민간인 2000여 명이 숨졌다.  

1949년, 장개석이 령도하는 국민정부는 중국공산당에 패하여 대만으로 도망쳤다. 200만 명의 병사와 공무원, 관료, 민간인이 대피했다. 그후 38년간 대만은 "백색테로"에 휩싸였다. 즉 계엄, 임의체포, 국가지지의 살인, 당국분리 및 섬내의 공산당침투에 대처하는 방대한 간첩망이였다. 국민당정부와 대만으로 이전한 엘리트들은 대만을 자유전선의 보루로 간주하고 대륙을 반격하고 공산당의 통치를 리탈할 계획이다.  

물론 많은 대만의 자유투사들은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있다. 이 기간에 1만 6,000명의 정치범이 감금되였는데 그중 몇명은 후에 대만민주운동의 지도자로 되였으며 하버드를 졸업하고 후에 부통령이 된 려수련과 립위, 민진당 주석인 슈밍더를 포함하였다.  

"백색테로"는 대만인과 대륙에서 전입한 많은 대륙인들에게 있어서 한차례의 외상적인 경력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대만의 외성에서는 이 두 집단의 분쟁이 일어났다. 대만의 부동한 집단간의 충돌은 이미 수십년간 지속되였다. 설사 다른 성의 통치엘리트라 하더라도 다른 성의 하층민들과 멀어진다. 그러나 정치공포의 고압통치하에서 부동한 민족과 집단은 화해를 이루기 어려웠다. 많은 젊은이들이 파벌을 구성하여 반란 단체의 신분을 통해 사회의 불안정을 막아냈다. 양덕창의 우수한 영화 ≪고령가 소년시대≫는 한 소년을 례로 들수 있다. 주인공은 존중과 신분을 구하는 절망으로 여자친구를 죽였다.  

2012년, 나는 마침 대만에서 대선을 치렀다. 나는 대만에 있는 친척 가족을 방문했다. 이 가문의 선조들은 모두 일본침략자의 침략과 반공을 항격하는 국민당군인들이다. 그들은 제2차 갑오전쟁에서 일본침략의 폭행을 겪었으며 마음속으로부터 일본인을 증오하였다. 

그들의 네 아들은 전후 대만 외성에서 온 두 번째 세대여서 그들이 대만 갱단과 자주 충돌하는 것을 잊은 적이 없다. 이들은 본성 민중들이 지지하는 민진당의 녹영에 대한 멸시를 감추지 않는다. 그들은 국민당이 령도하는 "람영"의 편에 서서 정적을 야만적이고 부패하고 허위적인 정객으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전형적으로 옛정을 그리워하며 중국 대륙에 대해 문화적인 친근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했을 때 나도 문화의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다른 성 인민들이 지지하는 민주운동을 동정하지 않지만 이런 다른 성 인민들은 온화하고 사려깊으며 열정적이다. 그들은 신대만에서 구중국의 일부 원소들을 느낄수 있었지만 이런 원소들은 대륙에서 끊임없이 제외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그늘아래 

특히 1950년대 지정학적 현실은 중국과의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다. 세계정치무대에서 국민당을 지지하는 미국은 국공내전이 실패한후 국민정부에 대한 신임을 잃었다. 냉전이 새로운 핵대전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미국은 공산주의 중국을 달래려는 입장이다. 1958년에 미국은 한편으로는 국민당정부에 대륙을 반격하지 말라고 경고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만의 군사공격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침범을 받지 않도록 보호할것을 약속하였다. 1971년에 중국공산당은 대만을 유엔에서 제외시켰다. 1년후 닉슨은 북경에서 모택동과 악수하였다. 미-대만 단교.  

그후 중국공산당은 점차 대만의 국제적영향력을 낮추고 심지어 WHO와 같은 비정치성조직을 선동하여 대만을 제외시켰다. 대만음악인 라대우의 1983년 서사시곡 ≪아시아의 고아≫. 대만으로 하여금 국제상에서 하나의 생동한 형상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즉 "아시아의 고아가 바람속에서 울고/노란 얼굴에 붉은 진흙이 있고/검은 눈에 하얀 공포가 있고/서방에서 동방에서 비가를 부른다/당신과 평등한 게임을 하고싶지는 않다/모두가 당신이 사랑하는 장난감을 원한다"는 주변화는 비극이지만 암암리에 적극적인 결과도 있습니다.  

아마 독립적인 대만이 인정하는 탄생이 국민당의 "한개 중국"서사와 결렬된것도 이런 변두리화의 경력에 기인한다. 1947년, 일본으로 망명한 민주인사들이 대만독립운동을 건립하였다. 그후 수십년간 국민당의 피비린 탄압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대만독립운동과 류사한 활동은 대만에서나 세계 각지에서 모두 힘을 얻었다. 대만독립분자들은 1970년에 미국을 방문한 장경국을 암살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장개석대통령의 후계자이다. 비록 암살에 실패하였지만 장경국은 리해할수 없었다(《왜 대만사람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가?》) 그의 교훈을 섭취하고 성민우호정책에 편입되여 대만민주화의 길을 열어놓았다.  

그사이 대만독립분자들은 점차 민중운동의 선구자들과 결합되였다. 그들은 1986년 민진당을 공동 결성했다. 1991년 당강령은 주권적이고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대만공화국을 수립할것을 요구하였다. 1987년에 장경국대통령은 계엄령을 해제하고 민중들에게 숨돌릴 기회를 주었다. 1990년에 학생들은 "야백합운동"을 시작하여 직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새로 당선된 리등휘 대통령은 반란을 평정하는 동원을 끝내고 이듬해 총선을 위한 길을 열었다. 그때부터 대만은 성공한 이야기였다. 그것의 경제뿐만 아니라 그것의 민주주의도 결실을 맺고 있다. 

이와 반대로 해협 맞은편 기슭에서 중국대륙의 민주운동은 1989년 6월 4일에 천안문광장의 피비린 학살로 끝났다. 중국공산당은 또 다른 모식을 결정하였다. 즉 극권정치체제의 통제하에 있는 지방시장경제는 공회의 보호가 없는 값싼 로동력을 리용하여 세계 각지에서 오는 투자를 끌어들인다. 1987년 대만법률이 대만민중들이 장기간 대륙과 분리된 가족을 면회하는것을 허용할 때 북경은 기회를 틀어쥐고 대만상인들이 시급히 수요되는 상업지식과 투자를 중화인민공화국에 끌어들였다. 1993년, 쌍방은 정식으로 외교접촉을 시작했다. 대만상인과 투자가 대량으로 대륙으로 류입된것은 중국경제의 비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대만 경제도 중국의 방대한 시장 덕분이다.  

젊은이들은 자신이 대만인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량안의 무역, 인적왕래, 관광과 공장의 대륙이전수량이 지속적으로 증가되였지만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대만의 경제의존도도 다소 제고되였다. 북경의 계획은 명확하고 조금도 숨기지 않는다. 대만이 점차 자신의 경제운행궤도에 융합되여야 한다. 최종목표는 정치면에서의 완전한 통합이다. 다른 방향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베이징의 방해를 느낄 수 있다. 인터내셔널은 홈페이지에 대만을 독립국가로 표기할 때마다 즉각 사과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말을 잘 듣는다. 희극적이고 상징적인 한 장면은 2014년 포르투갈에서 열린 유럽한학학회 2년 만에 열린 회의에서 공자학원 리더인 쉬린(徐林)이 주최측에 회의 매뉴얼의 한 페이지를 찢으라고 자청한 것이다. 그 이유는 회의 스폰서인 대만 장징궈(张经國)재단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서림의 히스테리 행태의 풍자는 공자학원이 사실상 베이징이 전 세계에서 소프트파워를 확장하려는 야심의 일부라는 점이다. 서림의 행위는 자기도 모르게 극권기계는 명령에 따라 운행되고 복종하기때문에 전혀 연약해질수 없다는것을 증명해주고있다. 중국의 경제와 정치력량이 시대와 더불어 전진함에 따라 서방세계도 점차 이 점을 리해하게 되였다. 이에 대해 대만은 이미 익숙해졌다. 몇십년간 대만해협의 위협에 직면하여 집문어귀에서 몇발의 미사일을 폭발시키는 맛을 보았는데 자신의 민주가 점차 외계에 의해 핍박당하고있음을 보아냈다.  

포르투갈 사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대만은 미래의 방향을 결정하는 변혁을 겪었다. 지우링허우의 대만 젊은이들은 대부분 무역복구를 반대하는 선봉적력량으로 되였다. 당시 마잉주() 대만 총통은 베이징과 이 협정을 협의하고 있었다. 마영구는 가능한 한 국민당을 점령할수 있는 로선을 중국대륙으로 접근하였다. 그는 반대파의 경고를 무시했다. 야당은 이 합의가 제조업 일자리 유출과 소득 손실을 초래하고 자본과 하이테크 인력 유출을 가속화하며 저기능노동자와 전문직 종사자들의 대만 진출을 간소화해 현지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만 젊은이들은 자신의 미래가 위협받는 것을 보고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나라의 친밀한 품에서 벗어나려 한다. 

젊은 세대는 구세대와 뚜렷하게 분리되여있다. 오늘날 20세에서 29세 사이의 80%가 자신을 아버지나 조상들처럼 "중국사람"이 아니라 대만인이라고 인정하고있다. 지난 몇세대 사람들이 식민력사, 극권공포와 경직된 전통적가치관으로 하여 계속 분렬되였던것과 달리 젊은이들은 민주적이고 개방적이고 번영한 대만에서 그들의 공동한 동질감을 찾았다. 이 대만에는 언론신앙의 자유가 풍부하고 공공사무에 참여할 권리도 있으며 생기발랄한 공민사회도 있다. 사람들은 중국 대륙과의 통일의 운명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인권 촉진에 자부심을 느낀다.  

홍콩이라는 옛 식민지가 지난해 거리로 뛰쳐나와 베이징에서만 독립한 법치를 유지하겠다고 항의하자 대만인들은 놀라움과 동정의 심정으로 홍콩의 발전을 지켜봤다. 북경의 서투른 반응과 최종적으로 홍콩을 법치에서 제외한후 대만의 "1중정책" 지지자들도 그 엄중한 후과를 똑똑히 알고있었다. 2020년 1월 11일, 민진당 전 주석이며 대만독립운동을 드팀없이 지지한 채영문은 57.13%의 득표율로 재차 당선되였다. 당시 대만사람들은 이미 중국대륙에서 새롭고 위험한 바이러스가 폭발하였음을 알고있었다.  

대만은 지금까지 전염병에 대한 처리가 매우 뛰어나다. 이 제도는 바이러스의 전파를 통제하는 면에서 아주 효과적이며 어려운 시기에 많은 나라에 의료용품을 아낌없이 제공하고있다. 그동안 세계 다른 나라들도 중국이 전염병 발생 초기에 숨긴 정도를 분명히 했다. 세계도 신강의 끔찍한 인권침해 사건과 홍콩이 한 나라, 두 제도라는 약속을 저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직 재위중인 트럼프 행정부는 한동안 친대만이었지만 이제 곧 출범할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국 대만에 대한 정책은 무엇일까. 그러나 유럽 정치엘리트들은 중국 외교장관의 분노에 질타하며 체코 의장의 대만 방문 권리를 지켰다.  

그러나 북경의 적의와 점차 기세드높은 자태에 비추어 국제적으로 대만의 이런 형식에 대한 인정이 여전히 부족합니다. 미국 등 대국의 확고한 지지가 없이는 대만이 수시로 폭발할수 있는 전쟁에서 승리할수 없으며 중국이 발동할수 있는 침입을 격퇴할수도 없습니다.  

그랜트 뉴햄은 이 글에서 대만과 자유시민 2400만 명이 함락되면 아시아 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의 시대는 종식될 것이라고 썼다. 그러나 그가 타이베이 거리의 소녀에게 미국이 그녀를 돕겠다고 약속할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다. 이 일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수 있다. 대만이 자기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를 알고있지만 세계가 이 나라를 운운할 때 분명히 정책을 잃게 된다.